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코 디 로마 (문단 편집) == 결말 == 이렇게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야심차게 결성한 코냑 동맹은 완벽하게 와해되었다. 그나마 피렌체만이 항전을 계속[* 피렌체 공화국의 최고 의결기관인 10인 위원회에서 '교황에게 항복하는 형태로 용병군에게 항복하자'라고 결의하기도 했다. 즉, 용병군에게 항복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했으나, 외부에서 결성된 지원군이 1530년 '''가비나나 전투'''에서 1주일 간의 격심한 교전 끝에 용병들에게 패배하여 외부로부터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결국 항복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역시 55세의 나이에 [[피렌체]]에서 무너진 성벽을 복구하는 것을 감독하는 식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피렌체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로마와 같은 참극은 면할 수 있었다.[* 물론 무차별적인 약탈과 학살, 강간이 없었을뿐 여기서도 저항한 인사들에 대한 학살 자체는 조직적,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용병들이 한 것이 아니라 카를 5세가 직접 주도한 점이 달랐다.] 사실 사코 디 로마는 애초에 부족하게 지급된 용병료 + 용병을 주축으로 한 군대 결성 + 급료 체불+ 용병대장의 죽음 + 그나마 권위가 있었던 지휘관의 전사가 모두 겹쳐 일어난 예외 중의 예외인 사안이었다. 기본적으로 [[용병]]은 오늘의 적이 내일의 고용주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생결단을 내면서 약탈하지는 않는 편이다. 어쨌든 피렌체에는 오늘날까지 르네상스 시대의 고건물들과 예술품들이 즐비하게 남아있어 피렌체 사람들을 먹여 살려주고 있다. 코냑 동맹의 붕괴와 함께 교황의 권위는 과거와 같은 권력은 꿈도 꾸지 못할 '이빨 빠진 호랑이' 수준으로 떨어졌다. 교황의 영향력은 정확히 교황령 안으로 축소되었고, 종교적인 탄압은 교황이 아닌 세속 군주들의 차원에서 벌어진 데다가[* 물론 명목상으로는 교황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주체는 엄연히 세속 군주들이었다.] 그나마 종교적인 문제 또한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부터는 명목상의 권한마저 축소되어 잇몸(...)까지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은 16세기 근세로 이행하는 격변기 속에서 황제권이 교황권을 역전한 이래 가장 확실한 쐐기를 박은 사건으로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교황이 세속 군주로부터 이렇게까지 굴욕을 겪은 바는 없었다. 이에 비하면 [[카노사의 굴욕]]은 사실 굴욕 축에도 끼기 어려울 정도이다.[* [[카노사의 굴욕]]은 황제의 권위에 교황이 공격을 가한 첫 번째 사건으로 보는 편이 가깝다. 오히려 교황권의 본격적인 상승이 시작되었던 사건이었다.] 또한 [[그리스도교]]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하여 궤멸적인 타격을 초래했던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사건인 동시에 교황권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한편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에게도 엉뚱한 불똥이 튀었다. 1527년 국왕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재혼하기 위해 첫 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 여기서 혼인 무효는 사실상의 [[이혼]]으로 가톨릭은 교회법으로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혼인을 무효로 돌리는 것만이 가능하다.]로 하기 위하여 교황 [[클레멘스 7세]]의 허락을 구했는데, 여기서 문제는 아라곤의 캐서린이 카를 5세의 이모였다는 것이다. 클레멘스 7세는 같은해 로마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며 볼로냐까지 마중 나가 굴욕적인 협정을 맺었고, 카를 5세가 헛기침만 해도 벌벌 떨어야 하는 처지까지 내몰린 그는 헨리 8세의 요청을 딱 잘라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헨리 8세가 난처해졌는데, 힘으로 카를 5세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교황이 있는 로마로 쳐들어갈 수도 없었다. 설령 그게 가능했다고 해도 잉글랜드에서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베리아 반도 옆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페인은 카를 5세의 땅이었고 당시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최강이었다.''' 여기서 헨리 8세는 겸사겸사 [* 대표적으로, 가톨릭 수사들에 대한 교황청의 통솔 부재 문제가 있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교황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자국민들이 허락하면 된다]]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어, '''가톨릭과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성공회]]를 탄생시켰다.''' [[앤 불린]]의 정실로서의 지위나,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에 대한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반역죄'''로 다루겠다는 법까지 승인한 것은 덤이었다. [* [[토마스 모어]]나 존 피셔 등이 바로 이때 숙청당한 인사들이었다. ] 교황 [[클레멘스 7세]] 본인도 로마에서 입은 [[트라우마]]를 죽을 때까지 해소할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비극을 잊지 않고자 1534년 과거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렸던 당대의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다시 초빙하여 성당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도록 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는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선종했고, 다음 대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에 가서야 완성을 보았다. '''15세기 유럽의 문예를 주도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 사건으로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고 평가된다.''' 이 사건과 전후의 이탈리아에서의 격렬한 전쟁은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다른 이탈리아 공화국들과 거리를 두던 베네치아 공화국만이 번영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오늘날 로마에 르네상스 당시 양식의 건물을 찾기 힘든 반면 후대 [[바로크]] 양식의 고건물이 즐비한 것도 그 영향이다. 실로 역사적인 도시 하나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것이다. 이 사건은 [[스위스 용병]]들의 활약상 중 [[1792년 8월 10일 봉기]] 당시 튈르리 궁에서 혁명군에게 전멸당한 786명의 스위스 근위대와 더불어 가장 장렬한 사수전을 보여준 일화로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위해 끝까지 충성을 바친 것에 감격한 교황청은 이후 [[스위스 근위대]]를 영원히 교황청 근위대로 쓸 것을 약속했으며, 현재까지 교황청에는 창을 든 스위스 근위대가 복무하고 있다.[* 다만 이 언약을 맺은 것은 사코 디 로마로부터 10년 후인 [[1537년]]으로 사코 디 로마에 휘말린 [[클레멘스 7세]] 본인이 선종한 뒤 후임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의 이야기이다. 사코 디 로마 직후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요구로 스위스 근위대를 독일인 용병으로 갈아치워야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매년 로마가 용병군에게 함락당했던 [[5월 6일]]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부근에 주둔하는 신참 스위스 근위병들은 [[1527년]]에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수백 명의 선배들을 기리며 충성 서약의 의식을 치른다. 비록 패배했음에도 그 용맹에 그 경의를 바치는 것이니 [[빈사의 사자상]]과 비슷한 의미인 셈이다. [[분류:16세기 사건 사고]][[분류:독일-이탈리아 관계]][[분류:바티칸 시국의 역사]][[분류:신성 로마 제국]][[분류:이탈리아어 단어]][[분류:이탈리아의 역사]][[분류:종교 사건 사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